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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의 자유인] "나무 심기는 역사를 통해 이어지는 한민족의 DNA" / 김은경(산림과학대학원 산림과학과 12 박사과정) 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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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책 '…나무를 심다'서 정조 재평가 최근 '정조(正祖), 나무를 심다'(북촌)를 펴낸 김은경(46)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은 '나무를 사랑하는 한문학도'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대뜸 "창덕궁(昌德宮)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경희궁에 머물렀지만, 즉위 이듬해인 1777년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창덕궁으로 옮겼어요. 그 뒤로 창덕궁은 정조의 주궁(主宮)이었죠." 암살 미수는 현빈이 주연한 영화 '역린'의 배경이 됐던 그 사건이다. 이 책에서 김 연구원은 '식목왕(植木王)'이라는 관점에서 정조를 재평가했다. 정조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일대에 심은 나무는 소나무·전나무·상수리나무 등 1200만 그루에 이른다. 현륭원은 고종 때 융릉(隆陵)으로 격상됐다. 사도세자의 곁에 묻힌 정조의 건릉(健陵)을 합쳐서 지금은 융건릉(隆健陵)으로 불린다. 김 연구원은 "정조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나무를 심은 왕"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정조 당시에 심었던 나무의 수종(樹種)과 연도 등 관련 자료도 방대했다. 이 자료를 말끔하게 요약해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던 신하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김 연구원은 정조의 식목 사업에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읽어낸다. 정조가 사도세자 무덤가의 소나무에서 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본 뒤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어라'라며 송충이를 집어삼켰다는 설화(說話)가 대표적이다. 김 연구원은 "이 일화는 후세에 만들어낸 허구에 가깝지만, 사도세자를 그리워했던 정조의 효심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가에 나무를 심겠다'고 결심한 것도 죽은 뒤라도 아버지가 뒤주를 벗어나 숲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또 규장각에 심은 소나무를 바라보며 김 연구원은 "정조는 학자들과 소나무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정조에게 식목 사업과 인재 양성은 사실상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무를 통해 역사를 읽어내는 김 연구원의 접근 방식은 대담하고 창의적이다. 김 연구원은 강원도 삼척의 탄광촌에서 현장 탄광소장의 딸로 자랐다. 어릴 적 그는 아버지 어깨 너머로 신문에 깨알같이 적힌 한자(漢字)들을 보면서 한문의 매력에 빠졌다. 그는 "아버지는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하루도 거르는 법 없이 신문을 꼼꼼하게 챙겨 보면서 배움에 대한 열정을 평생 간직하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김 연구원도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서예를 배웠다. 강원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한 뒤에는 대치동에서 한문 학원 강사로 활동했고, 숲 해설가 양성 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는 결혼하고 딸을 낳은 뒤 2010년 국민대 산림과학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한문에서 나무로 전공을 옮긴 셈이다. 김 연구원은 "궁궐·왕릉 같은 유적지에서 현장 답사나 해설을 맡으면 가장 많이 보는 것이 숲과 나무였다"면서 "나무와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학문적으로 풀어내고 싶은 욕심이 컸다"고 말했다. 지난해 박사 논문 주제도 '조선 왕릉의 수목 식재(植栽)에 관한 연구'였다. 그의 다음 목표는 창덕궁의 나무 이야기와 한국사의 식목 사업 전통에 대해 단행본을 펴내는 것이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식목에 관한 기록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식목은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한민족의 DNA"라고 말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4/21/2016042100183.html |